박희순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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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희순 루치아는 조선 후기 순원왕후의 궁녀 출신으로, 30세 무렵 천주교를 접한 후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인물이다. 순조의 유혹을 뿌리치고 궁궐에서 나와 천주교 신앙을 실천했으며, 1839년 천주교 박해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4일 순교했으며,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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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순 루치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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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희순 루치아 |
축일 | 9월 20일 |
인물 정보 | |
출생 | 1801년, 서울 |
사망 | 1839년 5월 24일,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교회 정보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박희순 루치아는 한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와 함께 성장했다.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일찍이 궁녀로 선발되어 순원왕후를 모셨으며, 젊은 순조 임금의 유혹을 물리치는 등 강직한 성품을 보였다. 30세가 넘어 천주교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궁궐 생활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신앙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온 후에는 천주교 신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조카의 집에서 언니와 함께 머물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신앙을 실천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하자 언니와 함께 체포되었고, 전직 궁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배교를 거부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켰으며,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도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동료 죄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마침내 1839년 5월 24일,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녀의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 역시 같은 해 9월 3일 순교하였다.
2. 1. 출생과 궁녀 시절
박희순 루치아는 한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곳에서 태어난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가 있었다. 그녀는 용모가 뛰어나 일찍 궁궐에 들어가 순원왕후의 궁녀가 되었다. 영리하고 유능하여 빠르게 승진했으며, 조선어와 청국어 읽고 쓰기에 능통했다. 한편, 그녀의 아름다움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15세 때 17세였던 순조 임금이 그녀의 미모에 반해 유혹하려 하였다.당시 궁녀들은 일반적으로 왕의 관심을 영광으로 여겼으나, 박희순은 왕비의 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순조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 일은 궁궐 내에 소문으로 퍼졌고, 훗날 앵베르 주교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은 용감하고 올곧은 행동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전까지 조선에서 본 적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2. 2. 천주교 입교와 신앙 생활
박희순은 30세가 넘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천주교의 가르침은 그녀에게 큰 빛으로 다가왔고, 기존의 궁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며 삶의 더 숭고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리를 더 깊이 공부하여 신앙을 키우고 싶었지만, 사치와 미신이 만연한 궁궐은 진리를 실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궁녀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궁궐에서 사는 것이 관례였기에 궁궐을 나오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병을 핑계 삼아 마침내 궁궐을 나올 수 있었다.[1]궁궐을 나온 후, 그녀의 아버지는 천주교 신앙을 강하게 반대하며 그녀가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카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박희순은 이전의 화려함을 버리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으며, 이는 조카와 그 가족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 그들도 천주교에 귀의하여 세례를 받게 되었다.[1]
얼마 후, 그녀의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도 조카의 집으로 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언니의 개종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생 박희순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1839년 박해가 시작되자, 그들은 조정의 탄압을 피해 안전하게 지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1839년 4월 15일, 계획을 세우던 중 포졸들이 집을 급습했다. 박희순은 침착하게 포졸들을 맞이하여 집 안으로 들여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가족과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1]
박희순과 언니를 포함하여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은 의연하게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고난을 예상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두려워하지 않았다.[1] 전직 궁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궁궐에서는 "현직 또는 전직 궁녀에 대해 불리한 증거가 있다면, 궐에 먼저 보고한 후 체포하라"는 교지가 내려졌다. 박희순은 궁녀 출신이었기에 더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1]
포장이 그녀에게 "궁녀라면 다른 여성들보다 더 배웠을 텐데, 어찌하여 그릇되고 비천한 종교를 믿느냐?"고 묻자, 그녀는 "저희는 이것을 그릇된 종교라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분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라고 답했다.[1] 포장이 배교하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하느님은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교우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신앙을 지켰다.[1]
포장은 그녀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그녀와 언니를 형조로 이송했다. 형조 감옥에서 그녀는 세 차례 더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매번 곤장 30대를 맞았다. 살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다리뼈가 드러났으며, 결국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상처를 닦으며 "이제야 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극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며칠 안에 상처가 아물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판서와 형졸들은 이를 요술로 여겼다. 죄수들이 배교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판서는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1]
"박희순과 그녀의 동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릇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소행은 사악하며 위선적입니다. 그들의 말과 침묵은 모두 미신이며 요술입니다. 그들은 말과 몸짓으로 저주 밖에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뉘우치기를 거부하니 죽어야 마땅합니다."[1]
감옥에서도 박희순은 다른 죄수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했으며, 근심과 의심에 빠진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1] 그녀는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힘든 수감 생활 속에서도 어서 주의 곁으로 가기를 열망했다. 하루는 형리를 불러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의 목을 베실 때에 겁내지 마십시오. 단칼에 자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1]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 역시 혹독한 고문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형법은 한 가족 구성원 두 명 이상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자매는 서로 다른 날에 처형되게 되었다.[1]
1839년 5월 24일, 박희순은 처형장으로 향하며 다른 죄수들에게 "우리 모두 천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사형장으로 가는 내내 기도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망나니의 칼날 아래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1]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는 그로부터 약 넉 달 뒤인 1839년 9월 3일, 54세의 나이로 처형되어 순교했다.[1]
2. 3. 체포와 고문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박희순과 가족들은 피할 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이 집을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했다. 박희순은 침착하게 포졸들을 맞이하고 대접하며, 당황한 가족과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라고 말하며 신앙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1]체포된 박희순과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를 포함한 천주교 신자들은 담담하게 감옥으로 향했다. 박희순이 과거 궁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궁궐에서는 전현직 궁녀에 대한 조사를 명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더욱 무자비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1]
포장은 박희순에게 궁녀로서 학식이 있음에도 어째서 "그릇되고 비열한 종교"를 믿느냐고 추궁했다. 박희순은 하느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분을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답하며 신앙을 변호했다. 포장이 배교하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댈 것을 강요하자, 그녀는 "하느님은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교우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끝까지 신앙 동료들을 보호하려 했다.[1]
포장은 박희순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그녀와 언니를 형조로 이송했다. 형조 감옥에서 박희순은 세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매번 곤장 30대씩을 맞았다. 고문으로 살이 찢겨 피가 흐르고 다리뼈가 드러났으며, 결국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상처를 닦으며 "이제야 저는 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심을 드러냈다. 그녀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고,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 관리들은 이를 요술로 여기기도 했다.[1]
박희순이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자, 판서는 "박희순과 그녀의 동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릇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소행은 사악하며 위선적입니다. ... 그들은 뉘우치기를 거부하니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며 사형을 건의했다.[1]
옥중에서도 박희순은 다른 죄수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사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순교를 앞두고 그녀는 형리에게 자신의 목을 벨 때 망설이지 말고 단칼에 베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죽음을 담담히 준비했다. 언니 박큰아기 역시 혹독한 고문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당시 형법상 한 가족 두 명을 같은 날 처형할 수 없었기에 박희순과 다른 날 처형이 예정되었다.[1]
1839년 5월 24일, 박희순은 처형장으로 향하며 다른 죄수들에게 "우리 모두 천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갑시다."라고 격려했다. 그녀는 기도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1]
2. 4. 순교
박해가 발발하자 박희순과 그녀의 언니 박큰아기는 1839년 4월 15일, 조정의 탄압을 피할 계획을 세우던 중 포졸들에게 집을 급습당했다. 박희순은 침착하게 포졸들을 맞이하여 집 안으로 들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당황한 가족과 교우들에게 말했다.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므로, 우리 모두 기꺼이 받아들입시다."박희순과 그녀의 언니를 포함하여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의연하게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예상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직 궁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궁궐에서는 "만일 어떤 현직 궁녀나 전직 궁녀에 대해 불리한 증거가 있다면, 그들은 궐에 신고가 있은 후에 체포된다."는 교지가 내려졌다. 박희순은 궁녀 출신이라는 이유로 더욱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포장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궁녀라면 다른 여성들보다 더 많이 배웠을 텐데, 어째서 너는 그 그릇되고 비열한 종교를 믿을 수 있느냐?" 그녀가 대답했다. "저희는 이것을 그릇된 종교라 여기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분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포장은 "천주교를 포기하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은 저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그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교우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
포장은 그녀에게서 요구된 답변을 얻어낼 수 없음을 깨닫고 그녀와 그녀의 언니를 형조로 이송시켰다. 형조 감옥에서 그녀는 각각 30대의 곤장을 포함한 세 차례의 고문을 더 받았다. 그녀의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으며 다리뼈가 튀어나왔고, 결국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극심한 상처가 났어도, 그것들은 며칠 내로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보였고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판서와 형졸들은 그것을 요술로 보았다. 죄수들이 배교할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판서는 이렇게 보고했다.
"박희순과 그녀의 동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릇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소행은 사악하며 위선적입니다. 그들의 말과 침묵은 모두 미신이며 요술입니다. 그들은 말과 몸짓으로 저주 밖에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뉘우치기를 거부하니 죽어야 마땅합니다."
감옥에서 박희순은 주의 사도가 되어 죄수들을 가르쳤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했으며 근심과 의심 중에 있는 교우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녀는 순교할 준비가 되었다. 수감 생활은 극도로 힘들었지만, 그녀는 어서 주의 곁으로 가기를 열망했다. 하루는 그녀가 형리를 불러서 말했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의 목을 베실 때에 겁내지 마십시오. 단칼에 자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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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큰아기는 9월 3일까지 네 달을 더 기다려 54세의 나이로 처형당하므로, 그녀 또한 주를 위해 자신의 피를 뿌렸다.
3. 시복 · 시성
박희순 루치아는 박큰아기 마리아와 함께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1]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에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 시성식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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